[정평법회] 불자(재가보살)의 사회윤리, 지식정보플랫폼 운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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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평법회] 불자(재가보살)의 사회윤리, 지식정보플랫폼 운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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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9.08.23 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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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평불 8월 정기법회
박병기 한국교원대학교 대학원장
정의평화불교연대
2019년 8월 17일

“윤리란 보다 온전한 삶을 향하는 치열한 지향 그 자체”라고 박병기 교수는 말한다. 우리가 함께 살아가고 있는 이 사회는 한편으로 도덕 과잉의 사회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윤리 빈곤의 사회이다. 각 개인의 삶 속에서 최소한 외적으로는 도덕을 강조하고 있지만, 그것이 사회적 차원으로 전개될 때는 공정성과 같은 시민사회의 최소윤리도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준다.

시민이 갖추고 있어야 하는 교양과 윤리, 역량이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은 채 맞이하는 21세기는 세계적으로 무질서와 혼란, 테러 같은 퇴행적 현상을 수반하고 있다. 이 문제의 해결을 박병기 교수는 “깨달음의 가능성을 믿고 각자의 수행방법을 찾아 일상 속에서 실행하는” ‘재가보살’에서 찾는다. 자신이 맺고 있는 연기적 그물망을 인식하는 토대 위에서 최선을 다해 자비행慈悲行을 하는 것으로 구체화될 때 인류에게 희망이 있다.

 

2019년 정의평화불교연대 여름 수련회(2019.08.17.-18, 고반재)

불자(재가보살)의 사회윤리

박병기(한국교원대학교 대학원장)

하나. 우리 사회의 윤리 물음

우리가 함께 살아가고 있는 이 사회는 한편으로 도덕 과잉의 사회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윤리 빈곤의 사회이다. 이때 도덕과 윤리는 각각 개인적 차원의 도덕과 사회적 차원의 윤리를 지칭하는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다. 각 개인의 삶 속에서 최소한 외적으로는 도덕을 강조하고 있지만, 그것이 사회적 차원으로 전개될 때는 공정성과 같은 시민사회의 최소윤리도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준다.

우리는 성리학, 그 중에서도 좁고 경직된 주자학을 중심으로 하는 유교윤리가 개인과 사회의 도덕과 윤리를 지배하고 있던 조선을 주체적으로 극복하지 못한 채 20세기를 맞았다. 일제강점기로 상징되는 20세기 전반의 역사는 그러나 3.1이라는 주체성의 자각과 시민으로서의 자각이 싹트기 시작하는 분기점을 통해, 민주공화국을 표방하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립까지로 이끌어낼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주체적인 역량만으로 맞지 못한 광복은 남북분단과 한국전쟁, 이어지는 미국과 일본에의 의존을 통한 경제성장 및 자율성의 제한 등으로 이어지며 20세기 중후반의 역사로 우리를 내몰았다.

다행히 우리는 여러 번의 정치경제적 위기를 적극적으로 극복하면서 21세기를 맞았고, 이 과정에서 시민사회의 정착 또한 빠르게 이루어낼 수 있었다. 특히 가장 최근의 ‘촛불’로 상징되는 저항적 시민사회의 정착은 한편으로 국민소득 3만불 시대라는 외적 배경을 지니고 있기도 하지만, 더 중요한 지점은 ‘한국시민’으로서 지녀야 할 주체성과 자율성에 관한 확고한 인식과 실천의 토대를 마련해 준 점이다. 이제 우리는 오랜 역사적 종속성을 넘어설 수 있는 내외적 토대를 시민사회의 형식 수준에서는 확보하게 된 것이다.

“정당한 절차를 거쳐 탄핵이 진행되었고, 평화로운 정권교체가 이루어졌다는 것은 대한민국이 잘 굴러가고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수많은 자칭 공화국들과는 달리,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으로 불리기에 합당하다는 것을 스스로 입증한 것이다.(필립 페팃, 곽준혁 외 옮김, 『왜 댜시 자유인가-공화주의와 비지배자유』, 한길사, 2019, 7쪽)

미국 프린스턴대학 정치철학 교수이자 대표적인 신공화주의이론가인 필립 페팃이 자신의 번역서 앞에 붙인 ‘한국 독자를 위하여’의 한 구절이다. 그가 우리 상황을 얼마나 알고 있고 또 그의 판단이 적절한 것인지를 판단하는 과정이 따로 마련되어야 하겠지만, 2017년 4월 한국을 방문했을 때 ‘일부 한국인’이 촛불에 기반한 대통령 탄핵을 매우 당혹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이런 말을 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극단적인 태극기 집회의 군중들과도 차별화되는 이른바 보수 세력이 우리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의 일단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대체로 우리가 하는 일에 대해서는 폄하하고, 일본이나 미국과 같은 나라에서 일어나는 비민주적인 사태에 대해서는 무조건 옹호하는 사대적인 경향을 보인다.

어쩌다 이렇게까지 되었을까? 우리 사회는 시민사회이고, 그 주인공은 바로 우리 시민 자신이다. 이 시민이 갖추고 있어야 하는 교양과 윤리, 역량이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은 채 맞고 있는 21세기는 세계적으로 무질서와 혼란, 테러 같은 퇴행적 현상을 수반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윤리는 교양과 역량의 기반이 되는 요소인데, 이 윤리의 과잉과 빈곤의 공존 현상은 시민사회의 근간을 흔드는 요인이 될 수밖에 없다.

둘. 재가보살의 시민윤리

우리는 한국사회의 시민임과 동시에 한국불교공동체의 핵심 구성원인 재가보살이다. 재가보살은 출가보살과 함께 사부대중공동체의 두 축을 이룬다. 이 두 보살 사이의 차별성은 출가 여부에서 드러날 뿐, 그 이상의 것은 그리 많지 않다. 출가는 기본적으로 수행에 몰두할 수 있는 여건으로서의 의미와 출가를 단행하는 실천적 결단의 경험으로서의 의미를 지닌다. 정상적인 출가를 감행한 출가보살에게는 이 두 의미의 측면에서 존중감을 가질 필요가 있고, 그들이 모여 이루는 승가에 대해서도 수행공동체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를 지킬 필요가 있다.

그런데 문제는 갈수록 흐려지거나 왜곡되는 그 의미들에서 생긴다. 우리가 필요 이상으로 지켜본 것처럼, 승가공동체의 해체와 그에 따른 각자도생의 맥락 속에서 보살심(菩薩心)을 잃은 채 종교권력만을 지닌 ‘출가보살’들의 수행여건은 현저히 무너지고 있고 그에 따라 실천적 결단으로서의 출가정신 또한 급속히 망각되고 있다. 이런 상황이 지속되면서 이제 한국불교의 희망은 재가보살에게 있다는 주장이 끊임없이 나오고 있다. 그 중심에 바로 우리들이 있다.

물론 우리는 뗄 수 없는 출가보살들과의 연기적 고리를 인식하면서 그들이 제자리를 잡아가도록 요청할 수 있고, 앞으로도 이런 노력을 포기할 수 없다. 그러나 다른 한편 ‘보살로서의 재가자’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면서 시민의 삶 속에 보살정신이 스며들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요청과 마주하고 있다. 이 땅에 존재하는 한 우리는 ‘한국시민’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고, 그것도 21세기 초반이라는 시간적 한계 속에서 시민이자 보살로 살아내야 한다는 도덕적·종교적 요청과 직면하고 있는 셈이다.

재가보살은 깨달음의 가능성을 믿고 각자의 수행방법을 찾아 일상 속에서 실행하는 보살이다. 그 수행의 과정은 곧바로 자신이 맺고 있는 연기적 그물망을 인식하는 토대 위에서 최선을 다해 자비행(慈悲行)을 하는 것으로 구체화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불교인들뿐만 아니라 다른 종교인들, 종교를 갖고 있지 않은 일반시민들과도 만난다.

시민사회에서 모든 시민은 필수적인 공적 영역을 뺀 사적 영역에서 누구로부터도 간섭을 받지 않을 뿐만 아니라 어떤 지배관계로부터도 자유로울 수 있는 권리를 갖는다. 이러한 ‘비지배자유’는 종교 영역에도 당연히 적용되고, 우리는 어떤 종교도 타인에게 강요할 수 있는 권한을 지니지 못한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스스로 재가보살로서 잘 살아냄으로써 불교의 가치를 시민사회에 드러내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다른 구성원들과의 적절한 관계맺기를 통해 새로운 시대와 사회에 맞는 시민윤리를 함께 정립해가는 일이다. 후자의 관점에서 불자의 시민윤리는 우리 시민사회 전반을 아우르는 시민윤리의 한 축이면서 동시에 기반인 셈이다.

셋. 재가보살의 계율과 사회윤리

“천천히 마음 챙겨 행동하는 것 하나로 우리는 자기 자신과 가족, 학교, ... 정부, 지구공동체를 변화시킬 수 있다. 당신이 교사라면, 부모, 기자, 의사, 작가라면 당신의 행동으로 이런 변화를 일으켜보라. 우리는 집단으로 이 명상수련을 해야 한다. 우리가 처한 상황을 깊이 들여다보는 것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집단의 지혜를 창출하기 위해서는 저마다의 통찰을 집결시켜야 한다.” (틱낫한, 이현주 옮김, 《지금 이 순간이 나의 집입니다(At Home in the World)》, 불광출판사, 2019, 141쪽)

보살은 개인이면서 동시에 개인이 아닌 관계 속의 존재자다. 각자의 삶의 영역에서는 개인으로서의 속성을 지니지만, 그 속성을 깊이 들여다보면 타자와의 의존성이 명료하게 드러나는 그런 개인일 뿐이다. 그런 점에서 보살은 서구 개인주의적 관점의 개인일 수 없다. 같은 맥락에서 보살의 계율과 윤리는 개인윤리와 사회윤리로 온전히 분리되지 않는다. 보살의 계율은 자신의 동체성(同體性)에 대한 자각으로서의 지혜를 바탕으로 펼쳐지는 개인윤리이자 사회윤리이다.

재가보살의 계율은 오계(五戒)와 같은 보편적인 계율을 근간으로 삼아 그 시대에 맞게 재구성되고 구체화되어야 한다. 왜곡되고 과장된 돈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그 돈에 대한 객관적인 인식과 수용을 바탕으로 하는 돈의 윤리가 계율로 적극 포함되어야 한다. 우리는 돈을 벌어야 살 수 있고, 따라서 돈을 무조건 배척할 이유는 전혀 없다. 문제가 되는 지점은 그 돈이 돌아다니면서 빚어내는 관계의 왜곡 등의 현상에 대한 통찰의 결여이다. 재가보살의 계율은 각자의 삶의 영역에서 이 현상을 직시하고자 하는 수행으로 연결될 수 있을 때에야 비로소 제대로 작동할 수 있고, 틱낫한의 권고와 같이 공동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집단수행 또한 지속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어야 한다.

자본주의의 세계화는 돈의 세계화임과 동시에, 개인 차원의 노력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복잡한 문제의 세계화이기도 하다. 이미 우려할 만한 문제로 다가오고 있는 기후변화와 플라스틱 오염 등과 같은 생태 위기, 원자핵발전소와 핵무기로 인한 불안의 일상화 등이 그런 사례들이다. 그 어느 것도 우리와 직접 관련되지 않은 것이 없지만, 우리 한국인들은 핵발전소와 핵무기 문제와 특히 더 가깝게 만나고 있다. 이런 문제들에 대해 정확하게 인식하고 당장 각자의 삶과 구조적 맥락을 연결시키면서 대응하지 않는다면, 우리 아이들의 미래는 더 이상 보장될 수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다른 한편 익숙해지고 있다. 그 익숙함은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체념과 당장의 먹고사는 문제에 대한 과도한 몰두로 이어지며 문제의 심각성을 강화시키고 있다.

재가보살로서 불자의 사회윤리는 이처럼 모든 존재하는 것들 사이의 동체성에 대한 깨침에서 출발하여, 자신의 고통을 포함하는 모든 이들의 고통 감소를 위한 실천으로 이어진다. 그것이 가능하기 위해서 우리는 명상을 일상화해야 하고, 때로 함께 모여 명상하는 시간도 확보할 수 있어야 한다. 오늘 우리 정의평화불교연대 구성원들의 만남은 바로 그 함께하는 명상의 시간이자 공간이다. 이렇게 함께할 수 있음 자체를 기뻐하면서, 우리 일상 속에서 꼭 구현되었으면 하는 사회윤리의 구체적 맥락을 다음 몇 가지로 제안해 보고자 한다.

첫째는 우리 시민들이 스스로에 대한 객관적인 인식에 기반한 주체성과 자존감을 갖는데 불교 사회윤리가 기여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20세기는 외세에의 의존과 그 극복의 지난한 과정이었고, 21세기는 자본주의의 세계화라는 맥락 속에서 빈부격차 심화와 극단화, 여전한 사대(事大)의 시선 등이 얽히며 복잡하게 전개되고 있다. 3.1백주년을 맞고 있음에도 아직 온전한 독립을 이루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불교는 이런 현실을 직시하는 것에서 출발해야 마땅하고, 특히 불교 사회윤리는 더 적극적으로 현실을 보다 나은 방향으로 이끌어가고자 하는 실천으로 구현되어야 한다.

불교 사회윤리는 특히 관계의 맥락을 분석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다. 오늘 우리의 일상 속에 들어와 있는 다양한 관계와 의존의 맥락을 있는 그대로 들여다볼 수 있는 지혜를 불교 사회윤리는 지니고 있고, 우리 재가보살들은 그런 모범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그 과정에서 나와 분리될 수 없는 타자에 대한 따뜻한 배려의 눈길과 손길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하고, 때로는 날카롭게 사회구조와 역사적 맥락을 바라볼 수 있는 냉철한 시선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한국시민으로서 재가보살이 해주어야 하는 핵심 역할이다.

둘째는 자신의 일과 삶의 연결고리를 확보하는 과정에서 불교 사회윤리가 기여할 수 있어야 한다. 정업(正業)으로서의 일을 토대로 그 일을 통해 자신의 시간과 공간이 바람직한 방향으로 재구성될 수 있도록 개인적 차원에서 노력해야 하고, 동시에 그 일이 지니는 사회적 맥락을 통찰하면서 그 관계적 맥락으로서의 시민사회가 보다 바람직한 방향으로 나갈 수 있는데 실천적으로 기여하고자 노력할 필요가 있다. 그런 것을 제외하고는 다른 특별한 차원의 시민사회 영역은 찾기 어렵다. 그리고 그런 노력 또한 공동의 과정이 필요하고, 우리 정평불은 그 공동의 장을 마련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어야 한다.

마지막으로는 이 순간의 의미에 관한 통찰을 기반으로 하는 깨어있음의 유지라는, 불교적 경건함과 쉼의 조화로서의 윤리를 강조하고 싶다. 재가보살의 삶은 그 자체로 향기로워야 하고, 그 향기는 이 찰나의 의미에 관한 깨침에서 뿌리가 마련된다.

“우리의 참 고향집은 지금 (여기) 이 순간이다. 지금 이 순간을 사는 것이 바로 기적이다. ...... 평화는 우리 주변 모든 곳에 있다. 그 평화에 접속하면 우리는 변화되고 치유될 것이다. 그것은 신앙의 문제가 아니라 (명상)수련의 문제이다. ...... 우리는 진짜로 살지 못한다. 예쁜 아기가 다가와서 웃어줄 때 그 놀라운 선물을 받을 수 있도록 지금 여기에 깨어 있는가? 아니면 생명과 서로를 만날 그 값진 기회를 잃고 마는가?”(틱낫한, 앞의 책, 154, 156쪽)

이 순간의 의미는 일차적으로 우리 몸으로 다가온다. 자신의 몸에 친절해야 하고, 우리 몸이 마음과 함께 있을 때에만 참으로 살아있는 것이라고, 나지막하면서도 힘있게 강조하는 낫한스님의 음성이 바로 불교의 윤리이자 사회윤리이다. 윤리란 보다 온전한 삶을 향하는 치열한 지향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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