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부처학교] 2강 ‘동남아 참여불교의 교리와 실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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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부처학교] 2강 ‘동남아 참여불교의 교리와 실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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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9.07.23 0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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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준호 한국외국어대 교수
불교개혁행동, 정의평화불교연대
2019년 7월 19일

눈부처학교 두 번째 시간. 한국외국어대 조준호교수의 ‘동남아 참여불교의 교리와 실천’ 강의가 7월 19일 열렸다. 불교평론 등을 통해 동남아 불교를 활발하게 소개해온 조준호 교수는, 세계불교의 중심은 동남아시아이며, 이들 국가의 불교에 대해 오히려 타종교의 관심이 더 높다는 현실을 안타깝게 소개했다.

강의는 참여불교란 무엇이며, 어느 범주까지 참여불교라고 할 수 있을까 하는 질문에 대해 다양한 관점에서 풍부한 사례를 바탕으로 진행하였다. 조준호교수는 불교 역사의 재검토와, 근현대 불교에서 찾아보는 동남아 각국의 사례를 통해 참여불교를 넘어서 ‘불교란 무엇이며, 근본적으로 어떠해야하는가?’ 하는 이야기를 전개했다. 

나아가 스리랑카의 타밀족, 미얀마의 로힝야족에 대한 불교도들의 대처, 어찌보면 과도한 정치참여도 일반적인 사회참여와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는지 질문함으로써 ‘과연 참여불교란 무엇인가’ 하는 생각거리를 던졌다.

엄청난 양의 강의록 곳곳에 동남아 불교의 현재를 살펴볼 수 있는 유튜브 링크를 걸어놓고 흔쾌히 공개해준 조준호 교수의 열정에 감사드린다.

* 이 영상 제작과 배포를 위해 류남녕님과 교단자정센터(원장 손상훈)가 후원해주었음을 밝힌다. 

동남아 참여불교의 교리와 실천

조준호(한국외국어대)

 

Ⅰ. (사회) 참여불교란?

 

1. 참여불교(Engaged Buddhism)란?

참여불교(Engaged Buddhism)는 베트남 출신인 틱 낫한 스님으로부터 이름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실천불교(實踐佛敎)라 옮겨지기도 했다. 중국어에서는 입세불교(入世佛教)나 좌익불교(左翼佛教) 또는 대만에서는 인간불교(人間佛教)라고 칭해지기도 했다.

참여불교, Engaged Buddhism은 정확히는 ‘Socially Engaged Buddhism”라는 말이다. 불교에 근거한 이상 사회 구현을 목표로 하는 운동 불교라 할 수 있다. 불교로써 사회적, 정치적, 환경적, 경제적 고통과 정의롭지 않는 상황을 변혁시키려는 실천 활동이며 실천 운동이다.

 

2. 참여불교는 전통의 계승인가 이단인가?

인도불교의 배경

 

1) 석가모니 붓다의 직접개입 : 석가족의 멸망 시, 국가 간 물싸움, 왓지 침공에 대한 반대 등.

전도 또는 전법선언 : “비구들이여, 나는 이 세상의 모든 올가미로부터 벗어났다. 그대들 또한 나와 같이 모든 올가미로부터 자유롭다. 비구들이여, 그러니 이제 인간과 천인들의 이익(attha)을 위해 ‘세계에 대한 큰 자비심(lokānukampa)'을 가지고 ‘대중들의 복지(bahujanahita)'와 ‘대중들의 행복(bahujanasukha)'을 위해 널리 돌아다녀라. 그래서 두 사람이 한 길을 가지 말라. 비구들이여, 처음도 좋고 중간도 좋고 마지막도 좋은, 조리 있고 적절한 표현으로 법을 잘 설하라. 그리고 안팎(내용과 형식)에 있어 무엇이 순수하고 완전한 행위와 삶의 완성인지를 보여주고 설명하라. 중생들(sattā) 가운데는 법을 알아들을 아직 때묻지 않은 사람들도 많다. 그들이 법을 듣지 못한다면 구제 받지 못하고 퇴보할 것이다. 그러나 법을 들으면 곧 이해하고 깨달아 나아가게 될 것이다. 비구들이여, 나 또한 법을 설하기 위해 우루벨라의 세나니 마을로 갈 것이다.”

 

2) 초기불교 전통 : 찌다 우바새, 마하나마 우바새, 아소카(사람과 동물 위한 요양원 건립, 도로 표식, 가로수, 휴양소 설치, 우물, 법대관 설치 등)

- 북과 법륜(法輪)의 의미

 

3) 대승불교 : 용수, 제바, 호법 등 목숨 건 세계관 논쟁 참여

용수의 라트나발리(Ratnavali, 『寶行王正論』), 당시 국왕에 대하여 정치의 도리를 설함.

아소카의 사회복지의 사회참여보다 더 사회 참여적이라 평가(Ken James, The Social Face of Buddhism, pp. 231-233, 1989)

육바라밀의 보시와 인욕이 먼저 제시되는 이유.

(예, <법화경>의 상불경보살품(常不輕菩薩品)

대승교도들의 발원과 서원 그리고 회향 사상

 

3. 참여불교의 이념과 사상적 배경

 

1) 사무량심과 사섭법

<자애경(Metta Sutta)>의 불교 역사적 위상

 

2) 탄생게와 전도선언

 

3) 사회 실천적 중도 : 차별 배제

중도의 사회적 실천은 다음과 같이 확장되어 시설된다. 이 나라 저 나라 국경을 넘나들며 유행할 때 “그 나라의 풍속과 법을 따라 옳거니 그르거니 따지지 말라”고 한 것이다. 문화적 상대성을 적극적으 로 인정해야 하는 사회적 실천을 담고 있다.(Araṇavibhaṅga Sutta와 구루수무쟁경(拘樓瘦無諍經) )

 

4) 위계적 세계관 부정 : 인간 차별 등 비판

 

5) 사성제의 고통 지멸 문제

 

6) Kālāma Sutta : " 칼라마인들이여, 그대들이 의심하고 혼란스러워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의심스러운 것을 대하면 그대들의 마음속에 혼란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이제부터 칼라마인들이여 조심하라. 계시(啓示)된 가르침이나 (계시 성전에 따른) 성자들의 가르침에 의지해서도 안 되고, 옛날부터 전승되는 말이나 경전에 담긴 가르침이라고 해서도 안 되며, 일반 논리의 사유나 특수 논리의 사유라 할지라도 의지해서는 안 되며, 또한 심사숙고한 대상이라고 해서도 안 되며, 나아가 어떤 사변적 견해에 따른 환희심이나, 또는 그럴 듯하고 적당하게 보이기 때문에 그것들을 전적으로 진리라고 받아들이지 말라. 더 나아가서 ‘이 사람은 종교가(수행자나 성직자)이니까 또는 우리의 스승이니까하는 생각 때문에도 무조건 따르지도 말라."

 

7) 탁발

 

Ⅱ. 근현대 역사적 사례

 

1. 인도

암베드카르(Ambedkar), 로까미뜨라(Dhammachari Lokamitra), 상가락시타(Sangharakshita) 등.

 

1) 상가라끄시따(Sangharakshita : 1925.8.26. ~ 2018.10.30.)

 

상가락시타(Sangharakshita), 범세계불교교단우의회(TBMSG : the Trailokya Bauddha Mahasangha Sahayaka Gana)의 담마운동.

 

Sangharakshita's Life and Impact

Sangharakshita in India 1992

Sangharakshita's last tour of India: Nagpur 1992

~30 / 5.56 / 7.14

Sangharakshita's 92nd birthday

Sangharakshita's body arrives at Adhisthana (Ledbury , United Kingdom)

 

2) 로까미뜨라(Dhammachari Lokamitra) : Founder Bouddha Mahasangha of India

세계적인 불교지도자인 로까미뜨라(Lokamitra)의 신대승네트워크 창립 축하 영상 메시지

- 인도 Jambudipa Trust 로카미트라 법사(영국태생) : 인도의 불가촉천민의 신분해방을 위하여 40여간 활동.

Dhammachari Lokamitra Revival of Buddhism in India and its impact on Buddhist Dynamics in South Asia

Dr. Ambedkar and the Untouchables' Conversion to Buddhism

게시일: 2016. 4. 16. Social Engagement and Liberation

Nagaloka, Nagpur, India — 11th-14th October 2016

 

2. 스리랑카

 

1) 구나난다(Gunananda) 스님, 1873년, ‘파나두라(Panadura)의 논쟁’

144th Commemoration Ceremony of "Great Debate of Panadura" ‍‍| 144 වැනි පාණදුරා වාද අනුස්මරනය | 3.55~4.09 /7.10

“일찍이 스리랑카는 11세기와 13세기에 힌두교 세력인 인도 남단의 촐라(Chola) 족의 침공을 받았고 14세기에는 회교도의 침공을 받았다. 16세기에는 포르투갈로부터 가톨릭을 강요당했고, 17세기에는 네덜란드로부터, 18세기에는 영국으로부터 개신교를 강요당했다. 1873년, 스리랑카에서는 ‘파나두라(Panadura)의 논쟁’이라고 하는 유명한 종교논쟁이 있었는데, 이때 구나난다(Gunananda) 스님이 기독교도를 논파함으로써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박경준, <불교평론> [4호] 2000년 가을호)

 

2) 다르마팔라(Anagārika Dharmapala, 1864-1933)

- 인도에서 불교가 단절된 후 어언 700여년 후에야 불교부흥을 위한 운동이 일어났던 것은 아나가리까 다르마빨라(Anāgārika Dharmapāla)로부터이다. 인도에서 불교부흥운동의 선구적 역할과 계기는 다름아닌 인도아대륙에 인접한 스리랑카 출신에게 내준다. 그 이름이 바로 아나가리카 다르마빨라이다. 그리고 놀랍게도 출가스님이 아니라 재가자라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가 입적하기 3개월 전에 출가하여 비구스님으로 완결했다는 점도 의미가 크다. 아무튼 오랜 인도불교사를 통해 볼 때 불교가 주로 출가스님에 의해 주도되었던 역사에 반해 현대 인도에 있어서는 불교로의 개종운동을 펼쳤던 B. R. 암베드까르 박사와 함께 재가자 신분으로 불교부흥운동을 시작했다는 점은 대단히 획기적인 일이다.

- <파아나두라 대논쟁>(오진스님 편역)이라는 책이름으로 출간되어 이미 읽히고 있다.) 때문에 이 대론은 “꺼져가는 스리랑카 불교를 살린 일대사건” 또는 “스리랑카 불교부흥의 신호탄”으로 평가되고 있다. 불교를 저급한 종교로만 전락시키려했던 제국주의 종교인 당시의 기독교에 대항하여 스리랑카 사람들에게 큰 자부심과 자신감을 불러일으킨 큰 전환점이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불교와 기독교의 대론이라는 역사적인 사건은 또다른 엄청난 파급효과를 불러왔다. 즉 미국인 올콧트(H.S.Olcott. 1832~1907)와 그의 부인 브라밧츠키(H.P.Blavatsky)가 마침 스리랑카를 방문하여 이러한 논쟁을 참관할 수 있어 크게 감명을 받고 미국인 최초의 불교도가 되기에 이른다.

- 올코트 대령과 함께 「불교출판사(The Buddhist Press)」를 설립하여 불교도 교리문답을 스리랑카어로 번역, 간행과 불교 주간지를 창간했다. 이러한 주간지는 기독교 선교에 대항하여 더 많은 불교 학교를 설립해야 함을 역설하였다. 나아가 영어판 불교 주간지를 만들어 불교를 학문적으로 설명하는 데 중점을 두었는데 이는 영어 교육을 받은 상류층은 물론 유럽, 아메리카, 인도, 일본, 호주 등의 나라에도 전해져 불교에 대한 이해를 높이는데 기여하였다. 하지만 이보다는 마하보디 저널(The Mahabodhi Journal)이 널리 알려진 불교잡지가 되었다. 올콧트와 함께 전국을 순회하며 일반인들에 불교 강연을 하고 또한 불교관련 인쇄물을 배포하였다. 이때부터 데이비드 헤와비타르네라는 다르마빨라라는 이름으로 또한 불려졌다. 즉 다르마빨라는 ‘불법의 외호자’(外護者)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스리랑카에서의 이러한 불교부흥운동은 훗날 인도로 옮겨갈 수 있는 바탕이 되었다.

- 불교 최고의 성지인 보드가야에 이르러 다르마빨라는 대각회 창립을 결심했다고 한다. 보드가야의 마하보디 대탑이 엉뚱하게도 힌두교 사제의 관리와 소유에 있다는 사실은 그에게 더 큰 충격이었다. 이 일을 계기로 그는 “인도에서 불법의 횃불을 다시 점화시켜 성지를 회복하리라”라고 큰 원을 세워 보드가야는 물론 인도의 불교 성지들을 회복하고 인도에 불법을 널리 전파하겠다는 결심을 굳힌다. 이를 위해 그 해 5월 스리랑카 콜롬보에 마하보디 소사이어티(Mahabodhi Society, 大覺會)를 설립하게 한 계기가 되었다.

- 다르마빨라 사후 그의 유지를 이어받은 데와뿌리야 와리싱하 스님과 빤냐 띳사(Pañña Tissa) 스님이 계속해서 불적(佛蹟)의 관리보존, 불탑의 개수(改修), 성지순례자를 위한 숙박시설, 연구소, 도서관, 박물관, 의료시설과 다른 지역에 사찰 건립 등과 같은 활동을 하였다. 이외에도 마하보디 소사이어티를 중심으로 하는 여러 방면의 불교 활동이 전개하고 있다. 더 나아가 인도국내는 물론 세계 각지에 마하보디 소사이어티의 지부(支部)를 설치하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 그리하여 많은 인도인과 유럽인이 마하보디 소사이어티 불교회에 출가하여 스님이 되고 또한 재가 불교인으로 큰 역할을 하였다. 그 중에는 라훌라 상끄리띠야야나(Rahula Samkrityayana), 까시야빠(Kashyapa) 그리고 아난다 까우살리야야나(Anada Kausalyayana) 등이 불교학 연구와 불교에 관한 글로 유명하다.

오늘날 인도의 불적들이 이런 정도나마 보존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다르마빠라의 마하보디소사이어티의 노력이 크다. 인도 고고학회가 1904년 녹야원의 사르나트 불적 발굴을 시작했을 때도 당시 출토된 수많은 유물 과 유적들이 온전히 보존될 수 있도록 한켠에서 지원했던 사람도 바로 다르마빨라라고 한다. 또한 그가 창간한 마하보디 저널은 인도의 불교부흥운동을 세계에 널리 알리는 큰 기여를 하면서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다.

- 아나가리까 다르마팔라 스님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우리나라를 찾은 것은 그가 49세 되던 해의 여름, 1913년 8월 20일이다. 당시 일본을 비롯해 아시아 불교 국가를 순방 중이던 다르마팔라는 지금의 서울을 방문했다.

(참고자료 : 카하왓떼 스리 수메다(Kahawatte Siri Sumedha Thera), 『인도불교부흥운동의 선구자 - 제2의 아소카 아나가리카 다르마팔라』, 서울 : 불사리탑 ․ 레미엣나, 2010-10-23)

අනගාරික ධර්මපාල තුමා Anagarika Dharmapala

Anagarika Dharmapala | Wikipedia audio article | Wikipedia audio article

153 birth anniversary of srimat anagarika dharmpala at mahabodhi society bodhgaya

Henry Steel Olcott | 2018-02-18 | හෙන්රි ස්ට්ල් ඕල්කොට් තුමා

 

3) 아리야라트네의 ‘사르보다야 슈라마다나 운동(Sarvodaya Shramadana Movement)’

1958년 재가자 아리야라트네(A.T. Ariyaratne) 박사가 창설

The Sarvodaya Movement

Sarvodaya - 50 Years

Sarvodaya: The Awakening of All

A. T. Ariyaratne

Leading a Massive Social Movement with Wisdom: Dr. A.T. Ariyaratne

Interview : Dr. A.T. Ariyaratne 'Gandhi of Sri Lanka'

Dr. A.T. Ariyaratne, Walter Link: "Buddhist Leadership in Business & Social Movements"

담마키띠, 스리랑카불교의 평화론, <불교평론> 76, 2018, 겨울호

 

4. 스리랑카의 평화운동

 

1) 사르워다야(Sarvodaya) 평화운동

‘사르워다야’는 산스끄리뜨어로 ‘모두의 일어남’이라는 뜻이다. ‘사르워다야’는 아리야라트네(Ariyarathne) 박사가 대학생 봉사단을 발족하여 어려운 농촌 지역으로 내려가 봉사활동을 시작하면서 결성되었다. 현재는 스리랑카 전체 마을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1만5천 개의 마을이 참여하고 있다. 이 단체의 상근 활동가는 모두 1,500여 명이며 자원봉사자 20만 명에 달하는 스리랑카 최대의 비영리단체이다. 이 단체는 4,335개 기관을 통해 9만8천여 명의 아동을 돌보고 있다.

지난 50여 년간 활동해온 사르워다야는 현재는 복지, 난민, 인권, 평화, 여성, 아동, 출판, 재활, 명상센터, 친환경적인 농업기술센터, 경제개발 프로그램 등으로 체계적인 조직 구조를 갖추고 있다. 이 단체의 기본정신은 모두 불교사상에서 찾을 수 있는데 “불교적 가치와 불교원리에 따라 스리랑카의 정신적, 경제적 재건을 위한 봉사를 운동의 목적으로 한다.”고 천명한 바 있다. 다양한 가치를 가진 문화 속에서 시작된 사르워다야 운동의 원칙은 참신하다. 단체행동은 나눔, 고운 말씨, 건설적 행동, 평등한 관계를 바탕으로 한다. 기본적으로 독립성, 공동체 참여, 노동과 다른 자원의 나눔을 가장 큰 자산으로 여기며, 전 지구적으로 생각하고 지역적으로 행동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고 있다.

현대 아시아의 참여불교 운동 고찰 / 박경준 <불교평론> [4호] 2000년 가을호)

- [모두의 행복을 위한 봉사캠프 운동을 뜻하는 스리랑카의 ‘사르보다야 슈라마다나 운동’은 가장 오래되고 유명한, 불교계의 대표적 사회개혁 운동이다. 1958년 재가자 아리야라트네(A.T. Ariyaratne) 박사가 창설한 사르보다야는 19세기 말엽에 시작하여 20세기와 ‘식민지 이후’ 시기까지 지속된 불교 부흥의 한 표상이었다. ...

아리야라트네의 사르보다야 운동은 이러한 스리랑카 불교 부흥의 연장선상에 위치하는 것이다. 사르보다야는 1958년 콜롬보 나란다(Nalanda) 대학 학생들의 일련의 봉사 캠프에서 연원한다.

당시 이 대학 교수로 있던 아리야라트네는 학생들과 함께 한 가난한 마을에서 건물에 칠을 하고, 화장실을 만들며, 나무를 심고, 건강관리에 대한 강연을 하는 봉사활동을 펼쳤다. 이것을 시작으로 그와 그 친구들은 스리랑카 전역의 궁핍한 촌락에 많은 봉사캠프를 계속적으로 조직함으로써 이 운동이 출범하게 되자, 전국 각지에서 모인 청년과 성인들이 동참하였다. 이 봉사 캠프는 ‘슈라마다나(노동력의 보시)’로 불리게 되며, 1958년에서 1966년 사이에는 이러한 슈라마다나 수백 개가 개설되어 30만 이상의 자원봉사자가 참여하였다.

사르보다야는 1961년, 고대 도시를 부활시키기 위해 아누라다푸라에서 슈라마다나 캠프를 열었다. 여기서 참가자들은 이 운동의 이름를 ‘사르보다야’로 부르기로 결정하였으며 ‘불교적 가치와 원리에 따라 스리랑카의 정신적·경제적 재건을 위한 봉사를 운동의 목적’으로 한다는 결의문을 채택하였다.

1967년, 촌락의 깨달음을 성취시키겠다는 ‘100개 촌락 개발 계획안’을 발표하고 그것을 성공적으로 실천했다. 사르보다야는 1971년까지 400개의 촌락에서 슈라마다나를 운영하면서 촌락의 깨달음을 이끌었고, 10년 후에는 2,000개의 촌락으로 확산되었다. 1972년 아리야라트네는 교수직을 물러나 이 운동의 지도에 헌신하며, 그 결과 ‘레이먼 막사이사이상’을 비롯한 여러 상을 받게 된다.

사르보다야는 규모가 커지자 학생 위주의 봉사캠프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비정부 기구(NGO)로 발전한다. 또한 국제적인 후원 단체의 도움으로 교육센터, 도서관, 미디어 센터, 회의장, 행정 부서를 갖춘 대규모 개발교육 종합시설을 모라투와에 건립하였다. 이 본부의 현관에는 “스리랑카에 사르보다야적인 사회질서를 확립하고, 팔정도의 불교이념에 어울리는 세계를 건설하고자 노력하는 젊은 남녀 훈련생이 머물고 있는 이곳의 이름은 ‘담삭 만디라(Damsak Mandira)’로서 법륜의 모양으로 세워졌다.”는 안내문이 쓰여 있다.

이를 계기로 사르보다야는 점점 거대한 운동으로 발전해가며, 1980년대에는 NOVIB(네덜란드), FNS(서독), NORAD(노르웨이), 헬베타스(Helvetas, 스위스) 등을 비롯한 20개 이상의 단체들로부터 지원을 받았다. 이들의 지원으로 사르보다야는 직업훈련학교·공동농장·유치원·슈라마다나 캠프 및 수천 명에게 강한 영향을 줄 수 있는 프로그램을 추진하였으며, 그 결과 때로는 정부와 비교될 만큼의 강력한 국가적 실체가 되기도 하였다.

1985년 사르보다야가 활동하는 촌락의 수는 스리랑카 전 촌락의 1/3에 해당하는 약 8,000에 달하였다. 1983년 6월에 발생한 참담한 소요사태 이후 사르보다야는 스리랑카의 다양한 민족단체들을 참가시켜 평화회의와 평화행진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그 중에서도, 대통령의 요구로 몇 마일도 못 가서 중단되었지만, 83년 12월 6일 수천 명이 참가하여 가장 분쟁이 심한 지역을 통과하며 100일에 걸쳐 1,000마일을 행진하려던 것은 가장 극적인 계획이었다.

행진은 가끔 저항 세력과의 마찰을 일으켰지만, 아리야라트네는 “언제 어디서나 용감하게 죽을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이 사르보다야에는 200만 명이나 된다는 사실을 무기 든 자들에게 알려줍시다.”고 하면서 굽히지 않았다.20)

그러나 사르보다야는 그 사회적 영향력이 커질수록 정부의 견제를 받게 되었고, 그와 함께 후원자와 후원단체의 지원도 줄어들게 되어 그 미래는 밝지 않은 편이다. 이제 사르보다야는 새로운 자금원을 확보해야 하는 문제와 그들의 정체성을 재발견하고 새로운 미래를 설계해야 하는 문제에 직면해 있지만, 아리야라트네의 결의에는 흔들림이 없다. 마하트마 간디와 아나가리카 다르마팔라의 사상적 영향을 받은 사르보다야의 지도부는 이 운동을 위해 불교의 수행과 목적을 재해석하였다.

즉 자기 욕심을 버리고 세계에 봉사하는 것이 수행이 되었으며, 불교의 이상을 구체화하고 개인과 사회의 이중(二重)의 해방과정을 쉽게 이룩할 수 있는 새로운 사회 구조를 개발하는 것이 그 목적이 되었다. 아리야라트네는 사회적 관심을 결여한 채 내세적인 목적만을 갖는 불교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다.

그는 사회와 세계에 봉사하는 수행과 실천의 근거를 팔리 경전에서 직접 이끌어낸다. 경제적 활동에 대한 지침을 설하는 《구라단두경(Ku-t.adanta Sutta)》, 타인에 대한 의무와 사회윤리를 담고 있는 《육방예경(Sin.ga-lova-da Sutta)》, 현세에서의 행복한 삶을 위한 38가지 요소를 설명하는 《대길상경(Maha-man.gala Sutta)》, 좌절과 실패로 이끄는 행위를 설하는 《패망경(Para-bhava Sutta)》, 봉사만이 궁극적 목적을 성취할 수 있게 하는 가장 확실한 수단임을 강조하는 《본생담(Ja-taka)》 등이 그러한 경전들이다.

아울러 아리야라트네는 사성제와 사무량심(또는 四梵住)과 같은 불교 근본교리의 실천적인 재해석을 시도한다. 사르보다야에 있어 수행의 목적은 개인과 사회의 깨달음을 통한 이중적 해방을 지향한다. 아리야라트네는 이러한 이중적 과정을 “다른 사람이 깨닫도록 돕지 못한다면 나 자신도 깨달을 수 없다. 내가 깨닫지 못한다면 남들도 깨달을 수 없다.”고 설명한다. 사르보다야에서는 개인의 깨달음을 ‘인격적 깨달음’ 또는 ‘인격적 발달’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최고의 초세간적인 차원의 진리를 깨달을 수 있기 전에 자신을 둘러싼 사회 속에 존재하는 세속적 차원의 진리를 깨달아야 한다고 가르친다. 또한 사르보다야는 인간의 깨달음 및 발달 과정의 상호연관적 특성에 대해, 인격적·가족적·촌락공동체적·도시적·국가적·지구적 깨달음의 여섯 단계로 나누어 설명한다.

사르보다야에 있어 ‘발달’이란 서로 관련된 여섯 가지 요소 ― 사회적인 것·정치적인 것·경제적인 것·도덕적인 것·문화적인 것·정신적인 것 ― 가 각각 서로를 강화시켜 최상의 사회를 만들어 나가는 통합과정으로서, 이러한 과정 속에서 한 사회의 사회·정치·경제적 요소의 혁신은 반드시 그 도덕적·문화적·정신적 요소를 재정비하는 일과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정신적 가치를 바탕으로 한 통합적인 개발이라는 사르보다야의 이념은 식민지 시대 이후의 스리랑카에서 두드러진, 물질주의적이고 자본주의적인 개발 모델을 비판하며, ‘인간 중심적’인 개발 모델의 기본 목표를 물질적인 부의 창조가 아니라 ‘인간의 완성’에 둔다. 그리하여 사르보다야는 ‘빈곤도 없고 풍요함도 없는’ 경제 질서를 사회적 이상으로 추구한다.]

 

3. 태국

송위지, 동남아 불교는 소승인가, <불교평론> 33호 2007 겨울호.

① 많은 승려의 환속과 호국

400년 이상 유지되던 아유티야 왕조(A.D.1350-1767)가 멸망한 것은 무능한 왕실과 버마인들의 침입 때문이었다. 아유타야 왕조가 버마의 침략을 받았을 때 승려들의 환속이 대대적으로 이루어졌다. 이들 승려들의 대대적인 환속은 무엇이 진정 대승성을 지닌 것인지 보여주는 사항이라 할 수 있다. 이때 사찰에서 수행하던 승려들은 외적으로 침입으로 나라가 풍전등화의 위기에 몰리자 승단을 지키는 것만큼 나라를 지키는 것이 더 중요하다 하여 환속을 하였던 것이다.

1) 붓다다사(Buddhadasa) 비구, 담마피타카, 프라웨트 와시, 그리고 술락 시바락사(Sulak Sivaraksa) 등

Buddhadasa Bhikkhu

세계적인 사회운동가인 '술락 시바락사' 박사님의 영상 메시지

조현, 태국의 불교공동체 ‘아속’에서 한 달, <불교평론> 76, 2018, 겨울호

아속 공동체 창시자는 포티락 스님

- 2008년부터 시작된 금융 위기로 아시아 전체가 기우뚱할 때조차 아속은 조금도 장애 없이 발전해 자족경제의 힘을 보여줬다. 부니욤 네트워크는 현재 30개의 크고 작은 공동체와 9개의 학교, 6개의 채식레스토랑, 4개의 유기농 비료공장, 3개의 쌀 방앗간, 2개의 허브 의약품 공장, 하나의 병원, 160헥타르의 농장을 갖추고 있다. 결실은 아속만의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1990년대 푸미폰 국왕이 농업 국가 타이의 자족경제를 강조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타이교육부는 아속의 학교들을 모델로 지정해 서양 추종 교육이 아닌 타이다운 대안교육을 본받도록 했다. 또 포티락의 추종자인 잠롱 스리무엉 전 방콕 시장이 탁신 총리의 경제 자문이 되면서 금융 위기로 파산 위기로 몰린 농민을 위한 ‘빚으로부터 탈출 프로젝트’를 실시해 농민을 5일씩 아속에 보내 교육시켰다. 무려 30만 명이 아속에서 자연 농법과 자급자족 방식 등을 터득해 고향으로 돌아갔다.

- 스님들의 솔선수범과 헌신이 조화의 원천

아속공동체 하모니의 비결은 독특한 ‘식사 나눔’이다. 아속은 포티락을 비롯한 출가자들이 모태가 된 공동체다. 타이나 미얀마, 라오스, 캄보디아 등 동남아시아 불교 국가에선 아직도 스님이 새벽에 탁발하는 문화가 유지되고 있다. 아속에서도 탁발 문화는 같지만, 그 탁발 음식을 스님들끼리만 나누는 바깥과 아속의 나눔 방식은 달라도 너무 다르다.

 

4. 베트남

자작농/독립농(화전, 산간 밭농사)이 아닌 ‘집단농’(평야지대 벼농사) 사회적 유대 관계가 발달

(중국, 프랑스, 일본, 미국 등이 제압 할 수 없을 정도)

현대 베트남 불교를 ‘전투적 불교(militant Buddhism)’라고 불린다.

1989년 프랑스 식민지배에 승려들의 봉기 ‘승려들의 전쟁(Monk's War)’

 

1) 틱쾅둑(Thich Quang Duc) 스님, 1963년 사이공 거리에서 이 분신

1~25 / 2.28~3.39 / 4.46~

53~1: 30 / 23.30~23.41 / 41/10~45

33~1.28~ 2.10 /

 

2) 틱낫한(Thich Nhat Hanh, 1926∼)

What is True Love? | Q & A with Thich Nhat Hanh

[BTN불교TV] 틱낫한스님 특별법문 붓다의 길 1회

틱낫한스님 특별법문 - 제11회 질의응답시간 1 (Thich Nhat Hanh )

정경일, 베트남, 불타는 바다에서 핀 연꽃, <불교평론> 76, 2018.겨울

 

베트남불교의 사회참여

- 현대 베트남의 불교는 ‘전투적 불교(militant Buddhism)’로 불릴 만큼 정치적 행동성이 강하다.

- 예를 들면, 1898년 베트남 푸옌 지역에서 선사(禪師) 보쭈(Vo Tru) 주도로 프랑스 식민지배에 맞선 봉기가 발생했을 때, 식민당국은 그것을 ‘승려들의 전쟁(Monks’ War)’이라고 불렀다.

- 틱낫한의 참여불교와 평화사상

틱낫한은 1963년에 《참여불교》를 낸 것을 회고하며, 참여불교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참여불교’를 뜻하는 베트남어 ‘Dao Phat di vao cuoc doi’에서] ‘cuoc doi’는 ‘삶’ 또는 ‘사회’를 의미한다. ‘Di vao’는 ‘들어가다(to enter)’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베트남어로 참여불교를 가리킬 때 사용되는 ‘di vao cuoc doi’라는 말은 ‘삶 속으로, 사회적 삶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틱낫한은 모든 불교는 참여불교이며, 참여하지 않으면 불교가 아니라고 한다. 이는 참여불교가 새로운 불교가 아니라 불교를 실천하는 새로운 해석과 실천의 방식이라는 사실을 의미한다. 그 핵심은 ‘사회적 삶’에 참여하는 것이다.

틱낫한은 불교의 근본 가르침인 사성제(四聖諦)를 현대의 일상 언어로 해석하고 설명한다.

‘틱낫한은 무아(無我)와 연기(緣起)의 지혜도, ... 유마거사의 “중생이 아프니 나도 아프다”라고 한 비말라키르티의 가르침이나, “이것이 있어 저것이 있고, 저것이 있어 이것이 있다”는 나가르주나의 가르침 등이 모두 상호존재의 지혜와 자비를 나타낸다.

- ‘참여불교 14계율’의 12항은 다음과 같다. “죽이지 말라. 또한 다른 사람이 죽이게 하지도 말라. 생명을 보호하고 전쟁을 막기 위해 가능한 모든 방법을 찾아라.” 여기서 앞의 “죽이지 말라”가 철저한 비폭력을 가리킨다면 뒤의 “죽이게 하지도 말라”는 철저한 행동을 가리킨다. ‘비폭력 행동’인 것이다.

마지막으로, 빠뜨려서는 안 될 한 가지는 참여불교의 수행법이다. 참여불교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영적 수행’과 ‘사회적 실천’을 일치시킨다는 점이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수행법은 ‘마음챙김(mindfulness)’이다. 마음챙겨 하는 모든 것이 수행이기에 사회적 실천도 마음챙겨 한다면 수행이라는 것이다. 그런 불이적 마음챙김의 실제 체험을 틱낫한은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5. 미얀마

6회 : 참여불교 정신으로 민족주의 불 당기다[조준호, <현대불교> 2013년>

- 1906년에 기독교의 YMCA에 대항하기 위해 청년불교도연맹(YMBA: The Young Men's Buddhist Association) 결성된 것은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 단체는 미얀마의 젊은 변호사들이 스리랑카 청년불교도연맹(YMBA)을 알게 되면서 미얀마에서도 만든 것이다. 이 단체는 불교의 부흥과 불교학교 운영 그리고 미얀마의 전통문화보존을 위한 운동을 전개하였으며 발족 후 아주 빠른 기간에 전국 지부를 둘 정도로 발전하였다. 또한 미얀마 청년불교도연맹은 1919년 미얀마의 자치를 요구하기 위하여 대표단을 꾸려 영국에 갔지만 수용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의 경험은 이후 적극적인 민족주의 운동을 전개할 수 있는 바탕이 되었다.

불교와 관련하여 또다른 민족주의 운동은 다름아닌 1916년에 영국인들이 불교 사원에 신발을 신고 들어온 행위가 계기가 된 것으로 유명하다. 원래 인도를 비롯하여 동남아 불교권에서는 사찰 내에서는 신발을 벗고 들어가는 것이 기본 예의이다. 기본적으로 성스러운 장소에 신발을 신고 들어가는 것은 대단히 불경스런 실례로 간주한다. 때문에 영국인들의 이러한 무례에 청년불교도연맹은 법적으로 사원 내에서의 탈화(脫靴)을 요구하는 성명서를 영국식민당국에 냈으나 거절당했다. 이에 위빠사나 수행으로 유명한 레디 샤야도(Ledi Sayado) 스님은 부당성을 지적하는 장문의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이에 스님들은 성명서에 서명하는 운동으로 나아갔다. 그러는 과정에서 다시 1919년에 유럽 관광객들이 또다시 신발을 신고 사찰에 들어오자 스님들은 이를 지적하고 격하게 비판하였다. 이를 이유로 스님들은 당국에 체포되어 투옥되고 한 스님은 종신형까지 선고받았다. 이에 스님들과 불교도들은 식민정부를 비판하는 집회를 열자 위협을 느낀 영국은 정식으로 사과를 하고 사찰 내에 들어갈 때는 신발을 벗도록 공표하였다. 이 사건은 영국 식민지로 전락한 이후 처음으로 불교 문제와 관련한 저항운동의 효과를 체험했다는 중요성이 있다. 미얀마에서 청년불교도연맹은 계속해서 자치권을 얻기 위한 운동을 하면서 점차 정치적인 성격을 갖게 되었다. 결국 청년불교도연맹은 전국적인 모임을 통해 ‘전국불교도평의회(GCBA)’로 이름을 바꿨다. 이후 다시 다른 조직과 함께 ‘전버마평의회(General Council of Burmese Associations)’로 확대되었다. 전버마평의회는 영국상품 불매운동을 전개하여 스님들이 시장을 돌며 사람들에게 호소하였다.

미얀마에는 이처럼 청년불교도연맹으로부터 출발한 불교운동단체 외에 다른 단체들도 들 수 있다. 즉 이미 1897년 즈음하여 미얀마 전국각지에서는 불교단체들이 결성되어 불교를 보호하고 진작시키려는 활동이 전개되었다. 대표적으로 중북부인 만달레이에서는 불교협회(Buddhasasananugaha), 남부의 몰라민에서는 불교수지회(Sasanadhara), 서부의 뻬테인에서는 아쇼카 협회(Asoka Society) 등이 그것이다. 미얀마 근대사를 보면 이처럼 출가스님들이 역사와 민족문제에 그리고 민중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참여한 ‘참여불교’를 만나게 된다. 반식민지 반영투쟁운동의 지도자로 옷따마(U Ottama)스님의 다음과 같은 말이 유명하다. 그는 “불교교단은 한 마음으로 자신들의 정신적 이익을 위해 집중해 있을지라도 사람들의 고통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 불법의 위상은 신앙심이 좋은 존재들과 연결되어 있다. 교단의 보살은 반드시 고난 속에 있는 중생들을 이끌어야만 한다”고 하여 보살이란 말을 사용하면서 사회와 역사참여를 독려하였다. 그는 청년불교도연맹(YMBA)를 중심으로 영국에 대항해서 미얀마 대중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운동을 아주 적극적으로 전개하였다. 이 조직은 처음 양곤대학의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영국 지배를 항거하고 민족해방운동을 펼쳤으며 다른 학교로도 파급되었다. 우 위자라(U Wissara) 스님과 함께 주요 지도자로 역할 하였으며 이후 우 옷따마 스님은 전국적 규모로 반영운동을 확대시킨 운동가가 되었다. 그는 인도의 간디로부터 영국식민정부에 협력하지 않는 저항을 배워 미얀마 각지에 세금을 내지 말 것을 외국상품을 구입하지 말 것을 등을 선전하고 미얀마 문화를 파괴하는 영국을 비판하다 결국 여러 차례 체포 구금을 반복하다 1939년에 생을 마감하였다.

마찬가지로 우 옷따마 스님과 함께 청년불교도연맹에 속했던 우 위자라 스님은 경찰의 제지에도 불구하고 반영 설법을 하다가 거듭 투옥당했다. 하지만 그는 세 번째 투옥 시 단식으로 대항하다 166일 만에 옥사하였다. 우 위자라 스님이 옥사한 다음해에 영국통치에 저항하는 최대 규모의 농민 봉기가 일어났다. 32년에 진압되기까지 1만 명이 사살되고, 8000명이 체포되어 28명이 사형, 270명이 무기징역형을 받았다고 하는 것으로 그 정도를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때 농민들을 선동한 봉기의 지도자는 사야 산(Saya San) 스님이라한다. 사야 산 또한 체포되어 1937년에 교수형을 당했다.

미얀마독립에 크게 역할을 또다른 단체는 1930년에 학생들을 주축으로 조직되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이름 앞에 '떠킹(Thakin)‘이라는 말을 사용했다. Thakin은 미얀마 말로 주인이란 뜻으로 꺼인(Kayin), 까친(Kachin) 그리고 샨(Shan)족 출신의 병사들이 영국군 장교를 떠킹으로 여기고 있는 것에 반해 미얀마인은 미얀마인이 주인이라는 의식을 심어주기 위하여 이름 앞에 떠킹을 붙인데서 유래한다. 그들은 전국을 돌면서 강한 민족의식과 독립의식을 고취시켰고 1940년에는 출가스님들도 이러한 운동에 참여하였다. 이러한 조직은 1935년에 정치정당을 정식으로 창설하여 활동한다. 이들은 교육상에 문제에 있어 학생파업도 주도하기도 했는데 이 가운데는 마웅 아웅산(Maung Aung San)과 마웅 누(Maung Nu)가 지도자였다. 아웅산은 후일 미얀마 독립을 이끈 인물이 되고 마웅 누는 미얀마의 초대 수상이 된 우 누((U Nu : 1907 ~1995)이다.

미얀마 불교도들은 영국제국주의에 대항하여 민족과 정법을 지키겠다는 정신은 국내뿐만이 아니라 국외인 인도의 대각회(大覺會 : Mahabodhi Society)와 연계하여 인도의 불교유적지를 복원시키려는 운동을 펼쳤다. 대각회는 인도불교부흥운동의 선구자로 이야기되는 스리랑카 출신의 아나가리카 다르마팔라(Anāgārika Dharmapāla : 1864-1933)에 의해 설립된 불교부흥운동 단체이다. 미얀마의 짠드라마니 스님은 인도 성지에 40년간을 머물며 대각회와 함께 인도불교재건을 위한 노력을 기울렸다. 그러한 과정에서 후일 인도불교부흥운동의 또다른 축인 신불교(Neo Budhism)운동의 기수인 암베드까르를 불교에 귀의시킨 인물이다.

이상과 같이 식민지 시대의 미얀마에서 스님들이 보여준 사회적 기능과 역할은 다소 생소할 수도 있다. 이제까지 우리가 배워온 바는 초기불교전통을 잇고 있는 스리랑카와 동남아불교는 사회참여에 소극적인 소승이고 동아시아 불교는 대승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사고가 얼마가 도식적인 사고인지 그리고 합당한 견해가 아닐 수 있는지를 미얀마 불교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상좌국가의 불교도들의 사회적 영향력은 대승불교권보다 훨씬 크다. 그러한 불교도들의 적극적인 사회적 실천운동과 사상을 접하게 될 때, 이런 경우, 우리가 배워 온 바와 달리 어디가 대승이고 어디가 소승인지 헷갈릴 때가 있다. 그러면서 다시금 대승이 흥기할 때 이전의 불교를 소승이라 폄칭했던 시대적 상황을 여러 가지 측면에서 다시금 점검하게 한다.

“미얀마인들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불교와 떨어져서는 국가라는 개념을 생각할 수 없다” 라거나 “미얀마인이 되기 위해서는 불교도가 되어야한다”라는 수준이 그것이다. 그만큼 개개인의 일상생활에서부터 국가나 사회의 체제에 이르기까지 불교가 깊이 스며있음을 알 수 있다. 모든 방면에 있어 불교가 생활화되어 있어 저절로 불교국가라는 감탄이 나오게 되기도 한다. 불교가 미얀마인의 구심점이라는 사실은 실버스타인 교수는 “미얀마의 어느 지역에 있든지 불교의 가르침에 따라 행동하고 살아야한다는 강력한 믿음이 미얀마인들의 의식 속에 깊이 잠재되어 있다”라고도 한다.

이처럼 미얀마를 여행하는 사람이나 연구하는 학자들은 얼마가지 않아 불교와 미얀마가 불가분의 관계에 있음을 파악하게 된다. 불교의 주도하에 또는 불교를 구심점으로 미얀마는 하나의 문화권 또는 민족을 이루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러한 의식은 영국식민지배 기간 동안에 한층 더 강화되었다. 영국식민정부에 맞선 반제국주의 또는 반식민주의 운동은 바로 불교를 중심으로 일어났다. 이를 또한 ‘불교 민족주의’라고도 이름 한다. 불교중심의 민족주의 운동은 현재의 미얀마 이해를 위한 필수적인 요소이다. 최근 미얀마 서부에 이어 중부지역에서도 불교와 무슬림 간의 폭동은 세계 주요 언론의 이슈가 되었다. 물론 여기에도 스님들이 지도적인 위치에 있다. 미얀마 서부에서는 적어도 200여명이 죽고 140,000명의 무슬림이 거주지를 잃었다. 최근 중부에서는 약 44명이 사망하였다. 중부는 영국지배기간에 인도로부터 이주한 무슬림들이 많다. 이러한 미얀마에서 반무슬림 현상은 영국식민지배 기간 동안에 배양된 불교 중심의 민족주의와 관련이 있다.

과거나 현재에 이르기까지 미얀마는 불교, 국가, 승가, 국민이라는 네 요소의 관계로 설명된다. 이 네 요소의 긴밀한 상호 관계로서 사회적 통합력을 유지하며 내려왔는데 바로 영국식민지배기간에만 이러한 관계가 깨졌다. 즉 영국식민정부에 의해 국가와 다음 3가지 요소인 불교, 승가, 국민의 긴밀한 관계는 성립할 수 없었던 것이다. 달리 이야기하면 식민정부는 불교의 후원자나 보호자와 같은 역할과 기능을 거부하였던 것이다. 이는 영국의 미얀마 식민지배의 주요 실패 원인으로 이야기된다. 그리고 불교를 중심으로 하는 미얀마 민족주의 운동이 가속화된 이유로 본다.

미얀마 민족주의를 이끈 스님들로 먼저 우 띠라 스님이 이야기된다. 그는 동굴이나 묘지 등의 노천을 전전하면서 수행을 하였는데 그의 이러한 금욕적인 수행에 사람들이 크게 감동 하여 많은 물품을 스님에게 보시하였다. 스님은 이러한 시주물을 바로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에게 다시 회향하였다. 이같은 소문에 영국식민정부는 그를 체포하였으나 어떠한 죄목을 적용하지 못하고 석방했다. 하지만 그의 이같은 두타행과 시주물의 회향은 미얀마 사람들이 같은 민족임을 자각하게 하는 중요한 계기가 된 것이라고 평가한다. 다음으로 미얀마 민족주의와 관련하여 큰 역할을 했던 스님은 앞 호에서도 간략하게 언급하였듯이 레디 샤야도 스님이다. 그는 신발을 신고 사찰에 들어오는 유럽 관광객들의 무례를 비판한 성명서로 유명하지만 현재에도 위빠사나 수행의 지도자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는 인도로 성지순례하면서 불교의 중심 가르침인 연기법에 관한 저술과 함께 빠알리로 된 부처님의 생애를 미얀마어로 옮겨 일반 대중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널리 알렸다. 마을을 돌면서 불교모임을 열고 부처님의 생애와 가르침을 설명해 주는 설교자로서 활동을 하였다. 이러한 그의 활동은 불교를 중심으로 미얀마인들이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효과를 낳았다. 결국 미얀마의 청년불교도연맹(YMBA)은 스리랑카의 청년불교도연맹과의 교류 속에서 전국적인 규모로 발전하였다. 1906년에 창립된 청년불교도연맹은 향후 10년 운동의 방침을 종교 문화에 대한 문제가 중심임을 천명하여 영국식민정부의 탄압을 피할 수 있었다. 이 연맹은 전국에 불교학교를 개설하여 불교 교육을 시행하였다. 이 때 식민정부로부터 50%의 지원을 당연한 것으로 요구하였다고 한다. 왜냐하면, 영국 정부는 미얀마 국민의 세금으로 기독교 미션 학교에 50%의 지원을 하고 있었기에 불교 측의 요구를 거절 할 수 없었다. 마찬가지로 기독교 미션학교가 성경을 가르치듯이 불교학교에서도 불교교육이 가능함을 주장하여 시행하였다. 이러한 청년불교도연맹이 정치적인 성격을 띤 민족주의 운동으로 나아간 계기는 불교사찰 내에 유럽인의 착화사건 때문이었다. 결국 착화를 항의하는 저항운동에 스님들이 체포되고 종신형을 선고받기도 했지만 결국 불교계에 식민정부는 한 달 뒤에 사과와 함께 탈화를 공식화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우 위자라(U Wissara) 스님과 우 옷따마 스님처럼 스님들은 점차 정치적 또는 대중적 지도자로 역할을 하였다. 1921년 우 옷따마 스님은 불교적 민족주의를 담는 대중연설로 국민들로부터 열렬한 지지를 얻었다. 그의 연설 내용을 인용해 보면 다음과 같다. “부처님이 현재 계신다면 출가자는 여전히 정치에 간여해서는 안 된다고 설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처한 현재의 상황은 정치에 참여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부처님이 활동하셨던 나라는 외국인의 지배가 아니었지만, 현재 우리는 영국인에 손아귀에 있다. 이는 우리가 영국인의 노예상태로 전락해 있음을 의미하고 이러한 노예상태에서는 부처님의 궁극적인 가르침인 열반을 성취할 수 없다. 열반은 인간이 가장 자유로운 상태에 있을 때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지금 해야 할 일은 하루빨리 이러한 노예상태에서 벗어나는 일이다”(Rangoon Gazette Weekly Budget 1921/07/11)

흔히 출가자의 정치적 사회참여는 계율에 저촉되는 것으로 이해한다. 이러한 점에서 계율 전통이 온전한 미얀마에서 출가스님의 사회참여 논리는 시사하는 바가 많다. 그는 불교대의(大義)를 통해 역사대의(大義)와 사회대의의 모두를 실현하려는 보살도는 앞으로도 계속 음미될 것이다. 특히 불교의 궁극적 구원이 현실 정치적 상황과 무관하지 않음을 역설한 부분은 더욱 그렇다. 그는 불교의 비폭력 정신에 의거하여 영국식민정부와 투쟁에 있어 비폭력을 강조하였다. 여기서 그는 사람들에게 피해를 최소화하는 불교적 투쟁 방법으로 부처님의 전생담을 담은 자타카(本生經)를 인용하여 대중들을 깨우쳤다. 내용을 소개하면, 들소무리에 있어 왕으로 태어난 데바닷타는 훗날 자신을 위협할 수 있는 수컷 들소들을 낳는 대로 모두 죽여버린다. 이 때 미래에 부처가 될 보살은 어미 들소의 은밀한 보호로 숲에서 태어난다. 어미소는 새끼인 보살에게 “너의 발굽자국이 아버지 데바닷타만큼 자라기 전에서 숨어지내야 한다”라고 가르쳤다. 드디어 새끼들소는 자신의 발자국이 데바닷타의 발굽자국이 되었을 때 숲을 나가 데바닷타를 죽이고 들소무리의 평화를 이룬다. 여기서 우 옷따마 스님은 영국에 지배당하는 미얀마는 마치 새끼들소와 같은 신세로 항상 영국의 경계를 받고 있으니 먼저 새끼들소처럼 힘을 길러야함을 주장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그는 영국과의 투쟁은 종교를 떠나 서로 연대해야 함을 역설하였다. 결국 그는 체포되어 형 집행이 되자 이를 성토하는 대규모의 군중집회가 열렸다고 한다. 이후에도 그의 반복적인 투옥은 미얀마 국민들에게 반영사상을 고조시켰다. 이어 우 옷따마 스님도 우 옷따마 스님과 함께 영국정부에 세금납부 거부와 영국상품 불매운동을 펼치다 거듭되는 투옥 끝에 결국 옥사하였다. 그는 감옥에서 죄수복 대신 가사를 입도록 해줄 것을, 형무소에서도 보름마다의 포살을 주장하는 166일의 단식농성 끝에 옥사한 것이다. 이를 계기로 영국정부는 다른 스님들이 투옥되었을 때 가사착용과 포살을 인정했다. 이후에도 수많은 출가스님들은 영국에 굴하지 않고 계속해서 국민의 지도자가 되어 반영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러는 과정에서 많은 스님들이 투옥되고 교수형에 처해졌다. 불교의 지도자인 출가스님들이 외세에 의한 식민주의 저항하는 민족주의 운동의 선봉이 되었고 마찬가지로 독립 이후의 군부독재에 맞선 민주화 운동의 선봉장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스님들이 밤색 가사를 입고 정연한 대오를 형성하는 대규모 비폭력 시위는 장엄하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언론을 통해 접한 2007년 9월에서 10월의 민주화 시위는 아직도 우리의 기억에서 생생하다. 발단은 군사정부가 일방적으로 유가를 대폭인상하여 국민들의 생활고가 심해지자 스님들이 들고 일어선 것이다. 시위 참여 스님들이 군사정권에 대한 항의 표시로 발우를 거꾸로 뒤집어엎는 복발(覆鉢)로 행진하였다. 부처님 시대부터 스님들이 재가자들 앞에서 발우를 뒤집어엎는 것은 작복(作福)의 기회를 주지 않겠다는 무언의 시위이다. 복발은 군사 정권을 인정하지 않고 그들로부터의 보시를 받지 않겠다는 의지를 분명하게 밝히는 행위이다.

현재에도 미얀마에서 스님들이 사회문제에 있어 지도적인 그리고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역사적인 배경을 알 수 있고 그리고 미얀마 국민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이유 또한 알 수 있는 맥락이다. 불교정신으로 역사와 사회의 대의를 실현하려는 이러한 희생적인 보살도는 노블리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라는 말을 떠올리게 한다. 앞서 말한 대로 미얀마에 있어 불교가 국민들과 사회에 깊이 생활화될 수밖에 없는 그래서 불교와 떼어서 미얀마를 생각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마지막으로 한국외대 출간의 『미얀마』(p. 216)에 스님들이 민족주의 운동의 지도자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여섯 가지로 잘 정리하고 있는데 그대로 소개해 본다.

첫째, 영국정부는 미얀마를 합병한(1886년) 후에 승려에 신분제도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과격한 반영주의를 표방하는 승려수가 급증하여 이들에 의해 민족주의 운동의 도화선이 당겨졌다.

둘째, 마을의 정치적 지도자는 승려 외에는 생각할 수 없었을 정도로 승려는 마을의 유력자로 남아 있었다.

셋째, 승려는 정부의 지배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운 입장에 있었다.

넷째, 승려는 무소유를 원칙으로 하고 있어, 영국 정부에 대해 큰 책임이 없이 자유롭게 공격할 수 있었다.

다섯째, 승려의 사회적 지위는 전통적으로 높고, 마을에서의 상담역이나 교육자였으므로 민중에게 쉽게 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

여섯째, 어느 마을이나 승원이 있고 이 승원은 상가라는 조직체에 의해 통제되고 있어, 정치적 목적을 신속히 전달할 전국적 조직망을 가진 유일한 집단이었다.

이상과 같은 여섯 이유는 모두 많은 설명이 필요로 하는 시사점을 가지고 있다. 다만 한국 불교의 과거와 현재와 관련하여 한 가지를 언급한다면 다음과 같다. 즉 미얀마에 있어 외세지배 상황에서 스님들의 역할은 우리의 과거에 있어 임진왜란 때의 승병의 활약과 비교할 수 있다. 승병은 외침과 환란 속에서 살육을 당하는 중생의 처참한 현실을 방관하지 않고 출가자로서 계율에 어긋나게 칼과 창을 잡았다. 허약하기 짝이 없는 조선왕조가 결국 승병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전국적 조직망을 가지고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유일한 집단이 바로 승가라는 조직체였기 때문이다. 즉 승가는 그 자체로 강력한 힘을 결집시킬 수 있는 대중생활의 조직체이다. 개인화되고 파편화된 독살이의 세상에서 대의(大義)에 따라 가공할 만한 저력을 발휘할 수 있는 화합의 공동체인 것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미얀마에서도 군사정부가 가장 견제했던 조직체는 바로 승가라고 한다.

9회 : 불교로 민주주의와 사회주의 조화 꿈 꿔[조준호, <현대불교> 2013년>

미얀마 청년불교도연맹(YMBA)은 1917년과 1919년에 미얀마의 자치권을 얻기 위해 인도와 영국에 가서 활동하였으나 주목할 만한 결과를 얻지 못했다. 인도에 자치제를 허용한 반면에 미얀마에 허용하지 않은 영국에 불만은 더욱 고조되어 이제 미얀마는 불교가 앞장 선 종교적 투쟁보다는 종교와 분리된 정치적 투쟁으로 점차 선회하였다. 1930년대 말기에 이르면 불교스님들을 중심으로 하는 민족주의 운동이 점차 젊은 학생들이 주도하는 방향으로 옮겨간다.

1942년 3월에 이르면 미얀마는 다시 일본의 영향권에 놓이게 된다. 그렇지만 정확하게 일본의 ‘식민지배’라는 용어가 적절한지는 더 검토가 필요할 것이다. 영국이 지배하는 기간에 유럽을 중심으로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아웅 산’과 ‘떠킹’들은 영국 지배자들에 무력으로 투쟁할 것을 결의한다. 이러한 이유로 아웅 산 등은 영국을 포함한 유럽 연합군과 전쟁을 벌이고 있던 일본의 지원을 기대하였다.

14회. 미얀마 불교 조직과 구조 그리고 성격 / 군부에 버금가는 힘을 지닌 승가 공동체[조준호, <현대불교> 2013년>

 

2. 불교와 승단의 사회적 영향력

前 미얀마 주재 한국외교관의 말에 의하면 “미얀마에서는 군부 이외에 불교 승단이 유일하게 조직화된 세력”이라고 한다. 이렇게 조직화된 세력으로서 불교승단은 국민들의 존경심과 사회적 인식 때문에 결코 정부에서 소홀히 다룰 수 없다고 한다.

승단의 배경은 89%의 미얀마 불교인구에 있다. 그러한 불교인구 가운데 60%는 미얀마족이며 미얀마족의 99%는 또한 불교도라 할 정도로 견고한 배경을 가지고 있다. 시사하는 바는 미얀마 민족주의는 불교라는 종교문화가 중심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미얀마에서 외국인에 의한 기독교 선교는 공식적으로 금지된다. 하지만 한국개신교 선교사는 미얀마의 여러 곳에서 선교활동을 열렬하게 진행시키고 있다. 다만 독립 이전부터 있었던 가톨릭의 활동은 허용된다.

미얀마는 영국과 같은 서구열강의 식민지배의 저항과정에서 민족주의와 전통종교가 더욱 확고하게 자리 잡는다. 더 나아가 식민지시기에 영국 등의 서구 식민주의자들에 의해 기독교가 선교되었기에 다른 동남아 국가들처럼 기독교를 서구 제국주의와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다. 불교가 지배종교로서 미얀마 사회는 이슬람교에 대해서 압박을 가하고 있다. 미얀마에 있어 불교를 중심으로 하는 종교 간의 반목과 대립이라는 문제가 있음을 알아야한다. 이에 대한 역사적 맥락은 다시금 한번 검토되어야 한다. 이러한 점에서 미얀마는 종교와 민족문제가 복잡하게 중첩되어 있다.

미얀마 역사 전공자에 의하면 일반적으로 “미얀마족은 소수종족을 식민정부에 아부하는 협잡꾼으로 절하”하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즉, 영국 식민 지배기간 동안 영국의 분할 정책으로 기독교로 개종하고 식민주의의 군속으로 복무했던 일부 소수종족에 대한 반감이 아직도 남아있다.

미얀마 종교조직 가운데 불교 승가는 전통적으로 사회적 지위가 높고 지역사회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승가의 구성인인 스님들은 무소유의 상태에서 정부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운 상태에서 정부를 비판할 수 있었다. 때문에 미얀마에서 불교 승가는 군부 이외에 전국적 조직망을 가지고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유일한 집단이다. 즉 승가는 그 자체로 강력한 힘을 결집시킬 수 있는 조직체인 것이다. 군사정부가 가장 견제했던 조직체는 바로 승가였다.

복발(覆鉢 : pattanikkujjana)

- 영국식민지배 기간인 1920년대 우 옷따마(U Ottama)가 구속되자 버마 승가가 전국적으로 전개.

- 사프란 혁명이라고도 일컫는 2007년 9월에서 10월의 민주화 시위 등에서도 출가자가 선도했던 예에서도 알 수 있다. 시위에 참여했던 출가자는 군사정권에 대한 항의 표시로 복발(覆鉢)로 행진하는 것으로 군사 정권을 비판하였다. 미얀마 사회에서는 존경을 받는 출가자들이 사회문제에 있어서도 지도적인 역할을 담당한다.

“버마의 민주화 운동은 네윈 정권에 반대했던 스님들 중심으로 전개되었던 시위로 1988년과 2007년 2회에 걸쳐 진행되었다. 라지만 1988년 시위에서는 스님을 포함한 3000명의 시민들이 사망했으며 2007년 시위에서는 수백 명이 사망했다고”(송위지, 동남아 불교는 소승인가, <불교평론> 33호 2007 겨울호.p.69)

Saffron Revolution of Burma No.1 :By Sheinammao

Saffron Revolution 2007 in Burma (Part 1)

Saffron Revolution: A Nonviolent Army for Democracy

Saffron Revolution: What Happened in Pakokku 10 Years Ago

로힝야(Rohingya) 무슬림의 박해와 참여불교?

Anti-Muslim monk preaches hate: Ashin Wirathu

Interview with Buddish monk Ashin Wirathu English subtitle

Myanmar's Anti-Muslim Monks | AJ+ Docs

 

6. 라오스, 캄보디아

"프랑스는 라오스를 가톨릭 국가로 만들고자 시도했으나 불교 승려들의 도움을 받은 반식민주의 투쟁 운동 때문에 실패하고 말았다." (김홍구, 조준호 외, 『동남아불교사』, 서울 인북스, 2018. 1.27. p.224)

"사원은 화교파(華僑派), 베트남파, 라오파로 나뉘는데, 모든 사원이 방법의 차이는 있으나 고아원 등 사회복지 시설은 물론 일반 시민들이 필요로 하는 프로그램을 다양하게 운영하고 있다."(김홍구, 조준호 외, 『동남아불교사』, 서울 인북스, 2018. 1.27. pp. 228-229)

 

7. 해양부 나라 (송위지, 동남아 불교는 소승인가, <불교평론> 33호 2007 겨울호.pp.69-70)

중국계 (화교 화인)들의 사회참여 [중화불교도회]

- 동남아 불교의 지원 세력(사회참여 기금을 싱가포르, 홍콩 등의 화인들이 지원)

 

1. 법광(法光) K. Dhammajoti 스님

① 스리랑카 남부에서 ‘애민원’ 운영

② 방글라데시, 네팔 등지의 사미들 양성 교육기관 운영

고아원, 유치원, 병원 설립 운영

* 불교적 또는 깊은 수준의 사회참여는 세계관 비판 : 삼종외도와 오종 외도 비판

조준호, 「초기불교의 사회적 실천운동」, 『실천불교의 이념과 역사』 행원, 2002

-p. 24: “초기경전에서 보여주는 당시의 모든 세계관에 대한 적극적인 비판의 수준은 거의 ‘운동 차원의 실천’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며, 앞으로의 불교가 담당해야 할 사회적 역할 또한 무엇인지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러면 여기서 어떻게 인간과 사회의 문제를 비판하고 있는지를 아래의 몇 가지의 예를 통해서 살펴본다. 먼저 3종 또는 5종 외도설로 알려진 당시의 세계관에 대한 비판이다."

-p.34 : "사회적 참여란 현실 참여를 의미하며, 개인적인 차원을 떠나 일반 대중과의 관계를 맺는 적극적인 행위이다. 모든 실천의 문제에 있어 역사적 또는 사회적인 맥락을 떠나 있을 수는 없다."

-pp. 57~59 : [마치는 말] 초기불교에 있어 사회적 실천 운동의 중심은 인간과 사회의 세계관, 인간관을 변화시켜주는 것과 같은 근본적인 문제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왜냐 하면, 세계관, 인간관, 그리고 가치관의 문제는 바로 사회관 또는 사회사상과 직결되어 인간 행위와 실천이라고 하는 구체적인 삶의 현장이 형성되어지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간 평등에 반하는 차별의 사회제도인 사성계급의 한 예에서도 보여주듯이 세계관의 문제는 곧바로 인간 사회의 제도나 생활 양식은 물론 개개인에 있어서는 의식 구조의 뿌리로 작용한다. 따라서, 연기 중도에 따른 세계와 인간에 대한 비판적인 실천 운동이야말로 바로 인간과 사회 변혁의 핵심 문제라 할 수 있다. 즉, ‘실천의 문제는 그대로 세계관의 반영으로 세계관은 인간 행위 그 자체로서 삶을 이루는 현실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올바른 세계관의 확립으로서 ‘정견’(正見)은 팔정도의 시작이며 끝으로 특히 강조되었다. 특히 신본주의적인 실천 논리의 바라문교나 자이나교 등의 육사외도에 대한 비판은 모두 이러한 점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그것은 중도의 파사현정이라는 역동적인 말로도 표현된다. 파사현정의 실천은 기본적으로 불교의 사회 계몽적인 성격과 면모를 잘 보여준다. 나아가서 불교의 사회적 실천 운동의 성격은 기본적으로 세계관과 같은 근본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어 ‘종교적 실천 운동’이라는 맥락과 맞닿아 있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인간과 사회를 고통과 질곡으로 몰아넣는 세계관으로부터 고통과 질곡이 다하는 세계관을 이 사회 속에 실현하는 것이다.

다시 정리․반복하면, 불교의 사회적 실천은 자비심을 바탕에 두고 있으며, 그 내용에 있어서는 사회관의 뿌리가 되는 세계관에 초점을 맞추어 사회적 문제의 해결로 되울려 나오도록 하는 데 있다. 병 치료에 견준다면, 겉으로 나타나는 질병의 증상만을 증세에 따라 다루는 대증요법(對症療法)보다는 병의 원인을 다스리거나 제거하는 병인요법(病因療法)에 더욱 치중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단적으로 불교의 모든 가르침의 중심인 사성제의 체계에서도 잘 보여준다. 따라서, 인간고의 뿌리로 간주되는 모든 종류의 실체론적 사고 방식, 예를 들면, 신 중심의 세계관과 그에 따른 절대주의나 종교 근본주의와 결정론적 세계관, 무인무연의 우연론이나 유물론적 세계관, 감각적 쾌락에 매몰되어 있는 범부들의 일상적인 삶과 세속주의, 주술적 세계관에 바탕을 둔 주법 종교나 기복의 타파에 주력하였다. 그리하여 연기적 세계관과 무실체론의 무아설이 사회에 구현되도록 노력하였다. 성인(聖人 : ariyapuggala)과 성중(聖衆 : ariyasaṁgha)은 그러한 세계관이 완성된 가장 이상적인 인간과 사회를 의미하는 말이다. 모든 개인과 모든 사회가 성스럽고 거룩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전도선언’은 성인과 성중을 위한 운동으로 선포된 것이다. 사방으로 붓다를 포함한 60여명의 전문적인 전도단의 파견은 불교의 사회적 실천운동의 핵심으로 불교 역사상 가장 획기적인 사건이다. 성중화(聖衆化)를 위한 가장 전면적이고 본격적인 대사회적 운동이다. 이후 붓다의 45년의 삶은 물론 그의 제자들 그리고 모든 불교사도 전도선언에 압축시킬 수 있고 전도선언의 다른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결론적으로 붓다와 그의 제자들은 사회 참여의 가장 적극적인 실천자로, 그리고 불교는 사회 참여의 가장 이상적인 내용으로, 그리고 승가는 전면적인 사회적 실천의 전문 조직체이며 전형적인 모델로 볼 수 있다.”

* 사무량심과 사섭법

사무량심(四無量心 : catasso-appamaññā)과 사섭법(四攝法 : saṁgaha-vatthūni)은 사회적 실천의 내용은 물론 형식이며 방법으로도 나타난다. 먼저 사회적 실천의 이상으로 구체적으로 구현해야 할 내용으로 여러 곳에서 강조된다. 때문에 많은 경에서 출가자는 물론 일반대중이 이상적인 사회 구현을 위해서 실천해야 할 덕목으로 자주 소개된다. 예를 들면, 모든 행위(身口意의 三業)에 있어 적극적이고 창조적인 실천으로 십악(十惡)을 끊고 십선(十善)의 성취가 바로 사무량심과 연결되어 제시된다. 그리하여 남자나 여자는 집에 있거나 집을 떠나거나 항상 부지런히 닦아야 할 것으로 나타난다. 앞에서 인용한 사상적 혼란을 겪고 있는 케사푸타 사람들에게도 제시되는 실천덕목은 마찬가지로 사무량심이 제시된다. 항상 네 가지 무량한 마음을 사방(四方) 또는 육방(六方)에 가득 채우고 행위하라는 매우 적극적이고 진취적인 사회적 실천인 것이다. 그것은 다음과 같다.

자(慈)무량심: 모든 생명(중생)들을 사랑하고 따뜻하고 친한 마음을 동서남북과 상하에 꽉 채울 수 있도록 무량하게 내는 마음.

비(悲)무량심: 모든 생명(중생)들의 고통과 괴로움을 불쌍히 여겨 덜어주려는 마음을 동 서남북과 상하에 꽉 채울 수 있도록 무량하게 내는 마음.

희(喜)무량심: 모든 생명(중생)들에게 기쁨을 주고 곤란한 처지에 있는 사람을 위로해 주 는 마음 동서남북과 상하에 꽉 채울 수 있도록 무량하게 내는 마음.

사(捨)무량심: 모든 생명(중생)들을 평등하게 대해주고 상대가 되어주는 마음을 동 서남북과 상하에 꽉 채울 수 있도록 무량하게 내는 마음.

이처럼 사무량심은 모든 생명들에 대한 사랑하는 마음, 고통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 곤란한 처지에 있는 사람을 위로하여 기쁨을 주려고 하는 마음, 그리고 누구나 평등하게 대해주고 상대가 되어주는 마음을 이 세상 가득히 무량하게 채우도록 실천하는 것을 말한다. 이 외 에도 많은 경전에서 각각 따로 사무량심에 대한 가르침이 설해지고 있다.

사섭법은 사섭사(四攝事)라 한역되기도 하였는데, 보시섭(布施攝), 애어섭(愛語攝), 이행섭(利行攝), 그리고 동사섭(同事攝)를 말한다. 보시섭은 남에게 물질이나 법을 베푸는 것을, 애어섭은 남에게 친절한 말을 하는 것을, 이행섭은 남을 이롭게 하는 것을, 그리고 동사섭은 차별 없는 평등한 마음으로 남과 가까이하여 고락(苦樂)을 함께 나누려는 것이다. 모두 남과의 관계에서 적극적인 이타행을 강조한 사회적 실천 덕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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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야원 2019-07-27 18:45:29
많이 배웠습니다. 유익한 강의 감사합니다.